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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창세기 4장 · 마태복음 2:13-23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GEN.4.7
창세기 4장
배경
에덴은 이미 뒤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 밖에서, 3장이 정해 놓은 조건 아래 살아갑니다. 해산의 고통, 가시덤불을 내는 땅, 막혀 버린 돌아갈 길입니다.
4장은 성경에 기록된 첫 출산으로 시작합니다. 하와는 맏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 짓고, 그를 주신 분이 여호와시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땅을 갈았습니다. 두 사람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아직 제사장도 없고 성막도 없으며 기록된 율법도 없습니다. 이 시점의 예배란 한 사람이 무엇을 가져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가져오는가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첫 죽음이 일어납니다. 3장 19절이 예고한, 흙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그 죽음이 아닙니다. 살인입니다. 그리고 죽인 사람은 형입니다.
본문 풀이
3장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이 이야기의 짜임이 불편할 만큼 낯익습니다. 경고가 주어집니다. 무시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이미 답을 아시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네가 어디 있느냐"에 짝을 이룹니다. 사람은 얼버무립니다. 땅과 관련된 선고가 내려지고, 동쪽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하나님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셨듯이, 여기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은 자기 삶의 모양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경고, 실패, 땅에서의 추방, 하나님의 얼굴을 떠남. 그리고 그 사이를 이상하게 관통하는 자비까지도 말입니다.
왜 한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다른 제물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창세기는 그것을 곧바로 말해 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독자라면 그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이 내주는 단서는 하나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왔고,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을, 곧 처음 것과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그 차이를 믿음에서 찾고, 신앙고백서도 같은 취지로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6장 7항). 여기까지는 분명합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방식입니다. 틴데일 주석은 문제를 가인의 마음가짐으로 읽으며, 곡식 제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고 봅니다. 아담 클라크는 케니콧을 따라 아벨이 피 흘리는 제사를 더했다고 보고, 7절의 말씀을 문 앞에 마련된 속죄제를 가인에게 내미시는 것으로 읽습니다. 다만 클라크는 매기가 여기에 반대한 것도 함께 적어 둡니다. 케니콧이 히브리어에서 끌어낸 그 구분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석은 서로 갈리고, 클라크 자신의 주석이 그 반박까지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다툼 없이 못 박아 두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인은 내쫓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거시고, 경고하시고, 아직 받아들여질 길이 남아 있다고 일러 주십니다.
가인은 그 길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 장은 거절이 무엇으로 자라나는지를 따라갑니다. "아우"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죽임인지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세대 뒤 라멕은 두 아내를 둡니다. 2장 24절을 거스릅니다. 게다가 사람을 죽인 일을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이 일곱 배의 보호를 약속하신 자리에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장담합니다. 그러는 동안 문명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성읍이 서고, 가축을 치고, 악기를 다루고, 쇠를 다룹니다. 창세기는 이것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면서도, 이것들이 무엇을 해결해 준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전혀 다른 자리에서 끝납니다. 셋째 아들이 태어나고, 연약한 인간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손자 에노스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합니다. 주석가들은 이것을 법정의 증언으로 읽습니다. 자기를 쏟아 낸 자를 고발하는 증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피는 답을 요구하지만, 창세기가 내놓는 것은 억제뿐입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보복만 막아 세우는 표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은 바로 이 장면을 받아, 그리스도의 뿌린 피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더 큰 소리로 고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나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침내 피는 죄인을 고발하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신 물음에는, 자기 목숨을 내주며 우리를 지킨 한 형제가 대답이 됩니다.
오늘의 한 가지
오늘 누군가의 좋은 소식에 얼굴이 굳어지거든, 그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께 부르며 그에게 덜이 아니라 더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7절은 가인을 아주 이른 자리에서 붙잡습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들판까지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떨어진 얼굴에서 개입하십니다. 이것이 평범한 하루에 닿는 지점입니다. 동료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 명절 식탁에서 듣는 형제자매의 근황, 나보다 일이 잘 풀려 가는 친구. 무언가 툭 내려앉고, 몇 초 만에 그 사람이 그럴 만하지 않은 이유가 머릿속에 정리됩니다. 여기서 제삼의 길은 기쁜 척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악물고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보는 것도 아닙니다. 가인을 치지 않으시고 물음을 건네신 하나님 앞에 그 굳어진 얼굴을 그대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더 주시라고 소리 내어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가인이 손을 들기 전에 그 얼굴을 보셨고, 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제 얼굴도 보아 주십시오. 제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시기든 원망이든 혼자 곱씹는 억울함이든, 저를 그것과 단둘이 두지 마십시오. 처음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가져가게 하시고, 제 형제를 지키게 하소서. 아멘.
보조 본문 — 마태복음 2:13-23
보조 본문에 관하여
마태복음의 성탄 이야기에는 주검이 있습니다. 자기 가족을 죽인 일까지 요세푸스가 기록할 만큼 악명 높던 헤롯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죽입니다. 마태는 예레미야를 끌어옵니다. 라헬이 울며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창세기 4장은 폭력을 통과해 살아남은 한 줄로 끝났습니다. "아벨 대신에 다른 씨"입니다. 마태복음 2장도 같은 일을 합니다. 밤중에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지는 아기입니다. 약속은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피난민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위로받지 못합니다.
원어 묵상
로베츠 (רֹבֵץ) — 웅크리다, 엎드리다
틴데일 주석은 이 낱말을 가인에게 덮치려고 도사린 짐승의 그림으로 읽습니다. 문 앞의 짐승 같은 죄입니다. 아담 클라크는 같은 낱말이 네발짐승이 엎드리는 모습에도 쓰인다는 점을 짚고, 그것을 근거로 이 구절을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속죄제로, 곧 위협이 아니라 해결책을 내미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읽기는 정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주석가들은 합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구절만은 어느 쪽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가인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본문은 다스리는 것과 다스림을 당하는 것 사이에 중립 지대를 두지 않습니다.
교리문답
WSC 14 · WSC 69 · WCF 16.7
관련 구절
HEB.11.4 · 1JN.3.12 · HEB.12.24 · GEN.3.9-13 · GEN.9.6 · MAT.23.35
출처
tyndale:GEN.4 (CC BY-SA 4.0) · tyndale:MAT.2 (CC BY-SA 4.0) · adam-clarke:GEN.4 (Public Domain) · wcf:16.7 (Public Domain) · wsc:14 (Public Domain) · wsc:69 (Public Domain)